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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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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은 30년 전쟁 시기 신성 로마 제국의 군사 지도자였다. 보헤미아의 가난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황제 페르디난트 2세를 지지하며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프리틀란트 공작이 되었으나, 과도한 권력과 독자적인 행동으로 인해 황제에게 해임당하고 암살당했다. 발렌슈타인은 군세 시스템을 도입하여 상비군 형성에 기여했으며, 쉴러의 희곡 등 다양한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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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629년 안토니 반 다이크의 원작을 바탕으로 율리우스 슈노어 폰 카롤스펠트가 그린 초상화
출생 이름알브레히트 벤첼 에우제비우스 폰 발렌슈타인
출생일1583년 9월 24일 (구력: 9월 14일)
출생지헤르마니체, 보헤미아 왕국
사망일1634년 2월 25일
사망지헤프, 보헤미아
매장지므니호보 흐라디슈테, 보헤미아
로마자 표기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체코어 표기Albrecht Václav Eusebius z Valdštejna
독일어 표기Albrecht Wenzel Eusebius von Wallenstein
다른 이름Waldstein
군사 정보
소속신성 로마 제국
보헤미아 왕국
가톨릭 동맹
군 종류신성 로마 제국 황제군
복무 기간1604년–1634년
계급총사령관
참전 전투장기 터키 전쟁
우스콕 전쟁
30년 전쟁
백산 전투 (1620년)
데사우 다리 전투 (1626년)
슈트랄준트 포위전 (1628년)
볼가스트 전투 (1628년)
뉘른베르크 포위전
퓌르트 전투
알테 베스테 전투 (1632년)
뤼첸 전투 (1632년)
슈타이나우 전투 (1633년)
훈장금양모피 훈장
작위
작위프리틀란트 공작
작위메클렌부르크 공작
작위자간 공작
인물
특징발렌슈타인은 자신의 시대의 운명적인 힘을 구현했다. 그는 르네상스 시대와 바로크 세계에 속했지만, 예외적인 개인으로서 이러한 범주를 넘어섰다. 그는 체코 또는 독일 국적을 넘어, 가톨릭 또는 개신교 교파를 넘어섰다. 그는 보헤미아인이자 독일 제국의 왕자였다.
기타 정보
참고 자료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2. 어린 시절과 활동

발렌슈타인은 1583년 9월 24일 보헤미아(현재의 체코) 헤르마니체에서 가난한 프로테스탄트 귀족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5]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숙부 밑에서 자랐으며,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특히 이탈리아의 바로크 양식 미술과 건축에 영향을 받았다.[10]

1604년 루돌프 2세의 군대에 합류하여 헝가리에서 오스만 제국과 헝가리 반군에 맞서 2년간 복무했다.[5] 1606년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와 예수회의 지지를 얻었지만,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다.[7]

1609년 보헤미아로 돌아온 발렌슈타인은 모라비아의 부유한 미망인 루크레치에 넥쇼바와 결혼하여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1617년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페르디난트 2세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여 그의 신임을 얻었다. 1623년에는 하라흐 백작의 딸 이자벨라 카타리나와 재혼하여 두 자녀를 두었으나, 아들은 요절하고 딸만 살아남았다.[12]

1618년 보헤미아에서 프로테스탄트 반란이 일어나자,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 2세를 지원하여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 1620년 이후 몰수된 프로테스탄트 영지를 헐값에 사들여 보헤미아의 대귀족으로 성장했다. 1623년 프리틀란트 공국 공작에 임명되었고, 1625년에는 황제군 총사령관이 되어 30년 전쟁에서 활약하게 된다.[54]

2. 1. 가문과 성장 배경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의 헤르주마니체에서 귀족 집안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발렌슈타인이 12세 되던 해에 사망하였고, 발렌슈타인은 숙부인 알브레히트 슬라바타 폰 코슘베르크 밑에서 자랐다.[5] 숙부는 그를 슐레지엔의 골드베르크에 있는 개신교 문법학교에 보냈으며 1599년에는 알트도르프에 있는 개신교 대학에 보내졌다. 그는 1559년 ∼ 1602년에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거쳐 널리 여행했는데, 이탈리아 파도바볼로냐에서 강의를 들었으며, 이탈리아의 바로크 양식 미술건축에 취미를 갖게 되었다.[10]

조르지오 바스타가 지휘하는 루돌프 2세의 군대에 입대했고, 1606년에는 로마 가톨릭 교회교도로 개종해 합스부르크 왕가와 예수회의 환심을 사게 되었다. 발렌슈타인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신앙에 충실한 로마 가톨릭 교도가 된 것은 아니었다.[5]

3년 후인 1609년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로 돌아왔다. 예수회 고해신부의 주선으로 모라비아에 거대한 영지를 가진 3살 연상의 체코인 미망인 루크레치에 넥쇼바(Lukrécie Nekšová)와 결혼했고, 1614년에 그녀가 죽자 그 재산을 상속했다. 그는 자신의 비용으로 장차 신성로마황제가 될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 2세에게 베네치아와 전쟁(1617년)을 지원하기 위해 200명의 기병을 제공하여 그의 호의를 얻었다.[11]

1617년에 하라흐 백작(Count Harrach)의 딸인 이자벨라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어렸을 때 죽었고, 딸은 살아남았다.[12]

발렌슈타인의 두 번째 부인 이자벨 폰 하라흐

2. 2. 교육과 초기 경력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의 헤르주마니체에서 귀족 집안에 태어났다. 발렌슈타인이 12세 되던 해에 부모가 사망하자, 숙부인 알브레히트 슬라바타 폰 코슘베르크 밑에서 자랐다. 숙부는 그를 슐레지엔의 골드베르크에 있는 개신교 문법학교에 보냈으며, 1599년에는 알트도르프에 있는 개신교 대학에 보냈다. 1559년부터 1602년까지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를 여행했고, 이탈리아 파도바볼로냐에서 강의를 들었으며, 이탈리아의 바로크 양식 미술건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5]

조르지오 바스타가 지휘하는 루돌프 2세의 군대에 입대했고, 1606년에 로마 가톨릭 교회로 개종해 합스부르크 왕가와 예수회의 환심을 샀다. 그러나 신앙에 충실한 로마 가톨릭 교도는 아니었다.[7]

1609년,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로 돌아왔다. 예수회 고해신부의 주선으로 모라비아에 거대한 영지를 가진 3살 연상의 체코인 미망인 루크레치에 넥쇼바와 결혼했고, 1614년에 그녀가 죽자 그 재산을 상속했다. 그는 자신의 비용으로 장차 신성로마황제가 될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 2세에게 베네치아와 전쟁(1617년)을 지원하기 위해 200명의 기병을 제공하여 그의 호의를 얻었다.[11]

1617년, 하라흐 백작의 딸인 이자벨라 카타리나와 결혼하여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아들은 어렸을 때 죽었고, 딸은 살아남았다.[12]

2. 3. 결혼과 재산 형성

보헤미아의 귀족 가문 출신인 발렌슈타인은 1609년 모라비아의 부유한 미망인 루크레치에 넥쇼바와 결혼했다.[11] 그녀는 발렌슈타인보다 3살 연상이었으며, 1614년에 사망했다. 발렌슈타인은 그녀의 재산을 상속받아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11][12]

1623년에는 하라흐 백작의 딸인 이사벨라 카타리나와 재혼하여 합스부르크 왕가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12] 두 번의 결혼을 통해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한 명이 되었다.

3. 30년 전쟁

30년 전쟁은 1618년 보헤미아인들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프로테스탄트 동맹의 지도자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시작되었다. 발렌슈타인은 가톨릭과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했다. 전쟁 초기, 발렌슈타인은 황제파로 분류되어 재산을 뺏겼으나, 으로 탈출하여 페르디난트 2세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는 귀족 동료들의 정치적, 군사적 무능함을 멸시했고, 1619년부터 1621년까지 기병대를 모집하여 전투에서 활약했다.[9]

페르디난트 2세의 승리로 발렌슈타인은 큰 이익을 얻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보헤미아, 모라비아, 오스트리아에서 액면가의 절반(곧 1/3) 가격으로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업체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평가절상된 화폐를 이용하여 처형되거나 추방당한 귀족들의 영지 60여 개를 헐값에 사들였다. 이를 통해 북동부 보헤미아를 장악하고 1623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 1624년 프리틀란트 제후, 1625년 화폐 발행권을 가진 프리틀란트 공작이 되었다. 1623년에는 황제의 고문인 카를 폰 하라흐의 딸 이자벨라 카타리나와 결혼했다.[54]

볼가스트 전투에서 발렌슈타인


덴마크 전쟁(1625년∼1629년)은 발렌슈타인에게 최고의 기회를 제공했다.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휘하의 로마 가톨릭 동맹에 의존하는 것에 굴욕감을 느낀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이 황제의 재정 부담 없이 2만 4천 명의 독립적인 황제군을 편성하겠다는 제안을 수락했다. 1625년 4월 7일, 발렌슈타인은 신성 로마 제국과 저지대 지방(지금의 베네룩스 3국) 주둔 황제군 전체의 지휘관이 되었고, 알드링겐 백작 요한 장군을 부관으로 삼았다. 그는 프리틀란트 공작령을 무기와 군수품 보급 중심지로 만들었다.[54]

새 군대는 개신교 사령관 만스펠트 백작 에른스트를 데사우 근처에서 물리쳐 첫 승리를 거두었으나(1626년 4월 25일), 발렌슈타인은 만스펠트를 놓아주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권한 확대와 군대 증강(7만 명)을 허락받고 나서야 사임을 철회했다.

1628년,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발렌슈타인의 점성사가 되었다. 당시 케플러가 발렌슈타인에게 헌정한 천궁도.


발렌슈타인은 헝가리 지도자 가보르 베틀렌과 프레스부르크(포조니) 화약(1626년 12월)을 체결하고, 슐레지엔에서 덴마크인을 몰아냈다(1627년 7월).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와 협력하여 메클렌부르크, 홀슈타인, 슐레스비히, 덴마크 전체를 정복했다. 그는 슐레지엔의 자간 공국(1627년 9월 1일)과 메클렌부르크 공작령(1629년 6월 16일)을 받았다.

덴마크 전쟁 동안 해상무역과 해군력에 눈을 뜬 발렌슈타인은 제국 함대와 북해발트해의 제독으로 임명되었고(1628), 황제, 스페인, 한자 동맹 도시들과 함께 네덜란드영국의 해운업을 앞지르는 무역 회사를 구상했다. 그러나 슈트랄준트 정복 실패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발렌슈타인은 1552년 이후 개신교가 장악했던 모든 교회령을 로마 가톨릭에게 반환하라는 페르디난트 2세의 복원칙령(1629년)에 강력히 반대했다.[55] 그는 브란덴부르크, 포메라니아, 한자동맹 도시들과 같은 개신교 이웃들과 정치적·경제적으로 의논했고, 덴마크에 관대한 강화 조건을 제시하라고 페르디난트에게 조언했다.

슈트랄준트 정복 실패는 독일 제후들에게 발렌슈타인을 공격할 구실을 주었다. 제후들은 황제군 창설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는 전제 정치의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30년 7월부터 8월까지 열린 레겐스부르크 선제후회의에서 로마 가톨릭 및 개신교 제후들은 프랑스의 지도 아래 황제에 대항하여 발렌슈타인을 해임하고 황제군을 해산하지 않으면 황제의 아들 페르디난트 3세를 차기 황제로 선출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1630년 8월 13일,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을 해임했다.[56]

1630년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 2세에게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군대를 해산하고 프리틀란트로 돌아갔다. 그러나 1631년 브라이트펠트 전투에서 구스타프 아돌푸스가 틸리 장군을 격파하고, 1632년 레히 전투에서 틸리가 전사하자, 발렌슈타인은 다시 복직되었다. 그는 보헤미아에서 작센 군대를 몰아내고 구스타프 아돌프에 대항하여 진격, 알테 베스테 전투 후 그를 몰아냈다.

1632년 11월, 뤼첸 전투에서 발렌슈타인은 스웨덴군에게 패했으나, 혼란스러운 전투 중에 구스타프 아돌프가 전사했다. 발렌슈타인은 자신이 중재자가 되어 제국의 평화를 가져오려는 뜻을 품고, 이를 위해 자기 군대를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려 했다.[57]

발렌슈타인은 황제에게 반역자로 여겨졌다. 그는 보헤미아, 슐레지엔, 오스트리아 등 합스부르크 영토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스웨덴군이 레겐스부르크를 점령하고(1633년 11월), 남서부 독일의 스페인 세력을 지원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633년 10월에는 브란덴부르크를 위협하여 스웨덴과의 동맹에서 이탈시키려는 목적으로 슐레지엔과 브란덴부르크에서 전투를 벌였다.[9]

발렌슈타인은 작센, 브란덴부르크, 스웨덴, 프랑스와 평화 협상을 진행했지만, 그의 이중적인 태도에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측 협상 대표였던 아르님은 환멸을 느꼈다.

발렌슈타인은 점성술 예언을 맹신하여 부하들을 과신했다. 오타비오 피콜로미니, 마티아스 갈라스, 알드링겐 백작 요한, 멜키오르 폰 하츠펠트, 심지어 발렌슈타인의 점성술가 기안 바티스타 제노까지도 황제에게 충성하며 빈 궁정에 음모를 알리고 다른 장교들의 지지를 얻었다.

1634년 1월, 발렌슈타인은 50여 명의 장군과 연대장을 필젠으로 소집하여 반란을 준비했다. 피콜로미니의 보고를 받은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을 해임하고 갈라스를 임명했으며, 발렌슈타인과 음모 주동자들을 체포하거나 숙청하라는 특허장에 서명했다(1월 24일).[9]

프라하가 황제를 지지하자, 발렌슈타인은 필젠을 떠나 에거(오늘날 체코의 헤프)로 향했다. 2월 25일, 아일랜드인 월터 버틀러 장군, 스코틀랜드 출신 연대장 월터 레슬리와 존 고든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그와 트로츠카, 일로 등을 살해했다. 영국인 대장 월터 데버루가 잠결에 애원하는 발렌슈타인을 미늘창으로 살해했다.[9] 사후 그의 유해는 체코 공화국의 이친에 안장되었다.[9]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판화


전쟁의 신인 마르스로 묘사된 발렌슈타인이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 발렌슈타인 궁전의 본관 홀 천장 장식

3. 1. 배경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의 독일계 프로테스탄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교에 유학했다. 그러나 폭력 사건에 휘말려 제적되고 귀국 후 용병이 되어 합스부르크 가에 봉사하며 헝가리에서 오스만 제국과 싸웠다. 부유한 과부와 결혼하여 상속받은 재산을 바탕으로 금융업과 영지의 농업 생산성 증대를 통해 재산을 늘렸고, 보헤미아에서 용병을 모집하여 세력을 키워 나갔다.

1618년 보헤미아의 프로테스탄트가 반란을 일으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선출하자, 발렌슈타인은 반란 정부의 금고를 빼앗아 저항하고,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2세를 도와 반란 진압에 공헌했다.[54] 1620년 반란 진압에 따른 프로테스탄트의 영토 몰수 및 매매에 참여하여 토지를 헐값에 사들여 보헤미아에서 손꼽히는 대귀족으로 성장했다. 또한 1620년부터 1623년까지 군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황제에게 자금 대출과 사병을 제공했고, 같은 해 북보헤미아의 프리틀란트 공작(Herzogtum Friedland, Duchy of Friedland)에 임명되었으며, 페르디난트 2세의 측근 카를 폰 하라흐의 딸과 결혼하여 궁정에 발판을 마련했다. 1625년에는 자체 군대 모집을 신청하여 허가를 받고 황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54]

3. 2. 황제에 대한 충성과 초기 활약

삼십년 전쟁은 1618년 보헤미아인들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고, 프로테스탄트 동맹의 지도자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시작되었다. 발렌슈타인은 가톨릭과 합스부르크 왕가에 충성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발렌슈타인은 황제파로 분류되어 재산을 뺐겼고, 빈으로 탈출했다. 그는 페르디난트에게 충성했으며, 귀족 동료들의 정치적, 군사적 무기력함을 멸시했다. 반란군이 재산을 몰수했지만, 기병대를 모집해 1619년∼1621년의 전투에서 활약했다.[9]

1618년 여름, 진드지히 마티아슈 투른 백작은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모라비아로 진입하여 반란에 대한 충성을 확보하려 했다. 페르디난트와의 화해를 원하는 귀족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고위 귀족 지에로틴(Zierotin)의 사위인 게오르크 폰 나호트(Georg von Nachod)는 모라비아 기병대를, 그의 매형인 발렌슈타인은 보병대를 지휘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연대를 오스트리아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나호트의 군대는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목숨을 걸고 도망쳤다. 발렌슈타인의 대대장은 여러 계층으로부터 허가를 요구했고, 그러자 발렌슈타인은 칼을 뽑아 그를 찔렀다. “즉시 새로운 대대장이 임명되었고 더 큰 유순함을 보였다.”[9] 보헤미아인들을 버리고 그는 모라비아의 국고를 가지고 비엔나로 자신의 연대를 행군했다. 그러나 거기서 당국은 그 돈이 모라비아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 그러나 그는 미래의 황제인 페르디난트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었다.[54]

발렌슈타인은 퀴라시에 연대를 장비하고, 부쿠아 백작 샤를 본방튀르 드 롱그발 휘하에서 모라비아에서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와 가브리엘 베틀렌(둘 다 보헤미아 반란을 지지함)에 대한 전쟁에서 명성을 얻었다. 발렌슈타인은 (반란군이 1619년에 압수한) 자신의 땅을 회복했고, 흰 산 전투(1620년 11월 8일) 이후 그는 어머니 가문에 속한 영지를 확보하고 프로테스탄트의 토지를 몰수했다.

그는 새로운 소유지를 보헤미아 북부의 프리드란트 (Frýdlant)라는 영토로 묶었다.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발렌슈타인은 1622년 제국 궁정 백작, 1623년 왕자, 그리고 1625년 프리드란트의 공작이 되었다.[13] 발렌슈타인은 공국의 유능한 관리자임을 증명했고[14] 그의 귀족임을 강조하기 위해 프라하에 많은 대표단을 파견했다.[54]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의 승리로 이익을 보았다. 보헤미아 왕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보헤미아·모라비아·오스트리아에서 액면가의 절반(곧 1/3)으로 화폐를 찍어낼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 평가절상된 화폐를 가지고 처형이나 추방당한 귀족들의 영지 60여 개를 공시지가의 절반에 사들였다. 북동부 보헤미아를 손아귀에 넣어 1623년 9월 7일 신성로마제국의 제후, 1624년 3월 12일 프리틀란트 제후가 되었으며, 1625년 6월 13일 화폐 발행권을 가진 프리틀란트 공작이 되었다. 1623년 황제의 고문인 카를 폰 하라흐의 딸 이자벨라 카타리나와 결혼했다.[54]

16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페르디난트를 북부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 돕고, 가톨릭 동맹의 군대에서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 휘하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발렌슈타인은 ''bellum se ipsum alet'' 원칙에 따라 제국에 대한 전체 군대를 모집하겠다고 제안했고, 1625년 7월 25일에 최종 임관을 받았다. 군 사령관으로서의 발렌슈타인의 성공은 그에게 재정적 신용을 가져다 주었고, 이는 다시 그가 토지를 사기 위한 대출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는데, 그중 많은 부분이 정복된 보헤미아 귀족들의 이전 영지였다. 그는 페르디난트 2세에게 대출을 해주었고, 땅과 작위를 통해 상환받았다.[15] 발렌슈타인의 인기는 곧 3만 명(얼마 지나지 않아 5만 명)의 병사를 모집했다.[16] 두 군대는 1625년에서 1627년까지 처음에는 만스펠트에 대항하여 함께 싸웠다.[55]

3. 3. 프리틀란트 공작과 황제군 총사령관

발렌슈타인은 1618년 보헤미아인들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 반항하여 일으킨 반란으로 시작된 30년 전쟁에서 황제파로 분류되어 재산을 빼앗겼으나, 으로 탈출하여 페르디난트 2세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는 귀족 동료들의 정치적, 군사적 무능함을 멸시했고, 1619년부터 1621년까지 기병대를 모집하여 전투에서 활약했다.[9]

페르디난트 2세의 승리로 발렌슈타인은 큰 이익을 얻었다. 보헤미아 왕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보헤미아, 모라비아, 오스트리아에서 액면가의 절반(곧 1/3) 가격으로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업체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평가절상된 화폐를 이용하여 처형되거나 추방당한 귀족들의 영지 60여 개를 헐값에 사들였다. 이를 통해 북동부 보헤미아를 장악하고 1623년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 1624년 프리틀란트 제후, 1625년 화폐 발행권을 가진 프리틀란트 공작이 되었다. 1623년에는 황제의 고문인 카를 폰 하라흐의 딸 이자벨라 카타리나와 결혼했다.[54]

덴마크 전쟁(1625년∼1629년)은 발렌슈타인에게 최고의 기회였다.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휘하의 로마 가톨릭 동맹에 의존하는 것에 굴욕감을 느낀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이 황제의 재정 부담 없이 2만 4천 명의 독립적인 황제군을 편성하겠다는 제안을 수락했다. 1625년 4월 7일, 발렌슈타인은 신성 로마 제국과 저지대 지방(지금의 베네룩스 3국) 주둔 황제군 전체의 지휘관이 되었고, 알드링겐 백작 요한 장군을 부관으로 삼았다. 그는 프리틀란트 공작령을 무기와 군수품 보급 중심지로 만들었다.[54]

새 군대는 개신교 사령관 만스펠트 백작 에른스트를 데사우 근처에서 물리쳐 첫 승리를 거두었으나(1626년 4월 25일), 발렌슈타인은 만스펠트를 놓아주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권한 확대와 군대 증강(7만 명)을 허락받고 나서야 사임을 철회했다.

발렌슈타인은 헝가리 지도자 가보르 베틀렌과 프레스부르크(포조니) 화약(1626년 12월)을 체결하고, 슐레지엔에서 덴마크인을 몰아냈다(1627년 7월).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와 협력하여 메클렌부르크, 홀슈타인, 슐레스비히, 덴마크 전체를 정복했다. 그는 슐레지엔의 자간 공국(1627년 9월 1일)과 메클렌부르크 공작령(1629년 6월 16일)을 받았다.

덴마크 전쟁 동안 해상무역과 해군력에 눈을 뜬 발렌슈타인은 제국 함대와 북해발트해의 제독으로 임명되었고(1628), 황제, 스페인, 한자 동맹 도시들과 함께 네덜란드영국의 해운업을 앞지르는 무역 회사를 구상했다. 그러나 슈트랄준트 정복 실패로 계획은 무산되었다.

16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2세를 돕기 위해 발렌슈타인은 ''bellum se ipsum alet'' 원칙에 따라 제국 군대를 모집하겠다고 제안했고, 1625년 7월 25일에 최종 임관을 받았다. 군 사령관으로서의 성공으로 재정적 신용을 얻은 그는 토지 구매 대출을 받고, 페르디난트 2세에게 대출을 해주며 땅과 작위로 상환받았다.[15] 그의 인기로 곧 3만 명(얼마 지나지 않아 5만 명)의 병사가 모집되었다.[16]

데사우(1626년 4월 25일)에서 만스펠트를 물리친 발렌슈타인은 1627년 실레시아에서 만스펠트 군대의 잔여 세력을 제거했다.[16][17] 그의 군대는 프루드니크, 우와로프, 조리, 프시치나, 비톰, 리브니크, 코즐레, 스트젤체 오폴스키에를 포함한 많은 실레시아의 도시와 마을을 황폐화하고 불태웠다.[18]

이때 그는 황제로부터 사간 공국(실레시아)을 샀다. 그런 다음 그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틸리와 합류했고,[19] 그 후 덴마크 국왕을 도운 것에 대한 벌로 메클렌부르크 공국을 얻었다. 이는 하급 귀족에게 주요 영토를 수여하는 것은 다른 많은 독일 국가의 고귀한 통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20]

발렌슈타인은 "북해발트해제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1628년 그는 슈트랄준트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는데, 슈트랄준트는 프란츠부르크 항복과 그 이후의 포위 공격에 덴마크, 스코틀랜드, 스웨덴 군대의 지원을 받아 저항했고, 이는 그에게 발트해로 접근할 수 없게 하고 스칸디나비아 왕국과 네덜란드의 해군력에 도전할 기회를 빼앗았다.[17]

그는 볼가스트 전투에서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4세를 물리치고 그 후의 뤼벡 조약에서 덴마크를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했지만,[21] 발트해에 있는 제국 가톨릭군의 존재와 황제의 "반환칙령"이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를 갈등으로 끌어들였을 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20] 발렌슈타인은 1629년 스웨덴과 싸우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휘하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치폴스키의 군대를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발렌슈타인은 주요 스웨덴군과 교전하지 못했고 이는 갈등의 결과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22]

3. 4. 덴마크 전쟁과 메클렌부르크 공작

덴마크 전쟁(1625년~1629년)이 발발하자 발렌슈타인은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휘하의 로마 가톨릭 동맹에 의존하는 것에 굴욕감을 느끼던 페르디난트 2세에게 황제의 재정 부담 없이 2만 4천 명의 독립적인 황제군을 편성해주겠다고 제안했고, 페르디난트 2세는 이를 수락했다. 1625년 4월 7일 발렌슈타인은 신성로마제국과 저지대 지방(지금의 베네룩스 3국)에 주둔한 황제군 전체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알드링겐 백작 요한 장군을 부관으로 삼았다. 그는 연대장들에게 병력소집비용을 미리 주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었으며, 그의 프리틀란트 공작령은 무기와 군수품을 보급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새로 편성된 군대는 개신교 사령관 만스펠트 백작 에른스트를 데사우 근처에서 물리쳐 첫 승리를 거두었으나(1626년 4월 25일), 발렌슈타인은 만스펠트가 도망가게 내버려두었다는 비난을 받고 사임 의사를 밝혔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확대하고 군대를 7만 명으로 늘린다는 허락을 받고서야 비로소 떠나지 않기로 했다.

발렌슈타인은 헝가리의 지도자 가보르 베틀렌이 프레스부르크(포조니) 화약(1626년 12월)을 맺도록 힘썼으며, 슐레지엔에서 덴마크인을 내쫓고(1627년 7월), 바이에른의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 장군과 힘을 합쳐 메클렌부르크, 홀슈타인, 슐레스비히, 그리고 덴마크 전체를 정복했다. 그는 자신이 지출한 비용을 돌려받는 대신 슐레지엔의 자간 공국(1627년 9월 1일)뿐만 아니라, 제국의 세습봉토로서 메클렌부르크 공작령(1629년 6월 16일)을 받았다.

덴마크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한 메클렌부르크 공작들의 지위에 오른 후, 발렌슈타인은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해 했던 일을 끝내고 독자적인 정책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덴마크 전쟁 동안 해상무역과 해군력에 눈을 뜨면서 국제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제국 함대와 북해발트해의 제독으로 임명되었으며(1628), 네덜란드영국의 해운업을 앞지르기 위해 황제, 스페인, 한자 동맹 도시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무역 회사를 구상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부하 한스 게오르크 폰 아르님 장군이 일급 해군 기지로 물망에 오른 슈트랄준트를 정복하지 못해 실패로 돌아갔다.

3. 5. 복구령 반대와 해임

발렌슈타인은 1552년 이후 개신교가 장악했던 모든 교회령을 로마 가톨릭에게 반환하라는 페르디난트 2세의 복원칙령(1629년)에 강력히 반대했다.[55] 그는 로마 가톨릭을 보편화하려는 페르디난트 2세와, 페르디난트를 독일의 최고 지배자로 만들겠다는 자신의 바람에서 멀어져 있었다. 그는 브란덴부르크, 포메라니아, 한자동맹 도시들과 같은 개신교 이웃들과 정치적·경제적으로 의논했고, 덴마크에 관대한 강화 조건을 제시하라고 페르디난트에게 조언했다.

슈트랄준트 정복 실패는 독일 제후들에게 발렌슈타인을 공격할 구실을 주었다. 제후들은 황제군 창설에 불만을 품고 있었는데, 이는 전제 정치의 수단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630년 7월부터 8월까지 열린 레겐스부르크 선제후회의에서 로마 가톨릭 및 개신교 제후들은 프랑스의 지도 아래 황제에 대항하여 발렌슈타인을 해임하고 황제군을 해산하지 않으면 황제의 아들 페르디난트 3세를 차기 황제로 선출하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1630년 8월 13일,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을 해임했다.[56]

3. 6. 재등장과 뤼첸 전투

덴마크 전쟁(1625년∼1629년)이 발발하면서 발렌슈타인은 다시 등장할 기회를 얻었다. 바이에른의 막시밀리안 1세 휘하의 로마 가톨릭 동맹에 의존하는 것에 굴욕감을 느낀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이 황제의 재정에 부담을 주지 않고 2만 4,000명의 독립적인 황제군을 편성하겠다는 제안을 수락했다.[54] 발렌슈타인은 1625년 4월 7일 신성로마제국과 저지대 지방(지금의 베네룩스)에 주둔한 황제군 전체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고, 알드링겐 백작 요한 장군을 부관으로 삼았다.

새로 구성된 군대는 개신교 사령관 만스펠트 백작 에른스트를 데사우 근처에서 물리쳐 첫 승리를 거두었으나(1626년 4월 25일), 발렌슈타인은 만스펠트를 도망가게 내버려두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권한을 확대하고 군대를 7만으로 늘린다는 허락을 받고서야 떠나지 않기로 했다. 발렌슈타인은 헝가리의 지도자 가보르 베틀렌이 프레스부르크(포조니)화약(1626년 12월)을 맺도록 하고, 슐레지엔에서 덴마크군을 몰아냈으며(1627년 7월), 바이에른의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 장군과 힘을 합쳐 메클렌부르크, 홀슈타인, 슐레스비히, 그리고 덴마크 전체를 정복했다.

1630년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 2세에게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군대를 해산하고 프리틀란트로 돌아갔다. 그러나 1631년 브라이트펠트 전투에서 구스타프 아돌푸스가 틸리 장군을 격파하고, 1632년 레히 전투에서 틸리가 전사하자, 발렌슈타인은 다시 복직되었다. 그는 보헤미아에서 작센 군대를 몰아내고 구스타프 아돌프에 대항하여 진격, 알테 베스테 전투 후 그를 몰아냈다.

1632년 11월, 뤼첸 전투에서 발렌슈타인은 스웨덴군에게 패했으나, 혼란스러운 전투 중에 구스타프 아돌프가 전사했다. 이로써 발렌슈타인은 황제에게 더 이상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다. 발렌슈타인은 자신이 중재자가 되어 제국의 평화를 가져오려는 뜻을 품고, 이를 위해 자기 군대를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려 했다.[57]

3. 7. 몰락과 죽음

발렌슈타인은 황제에게 반역자로 여겨졌다. 그는 보헤미아, 슐레지엔, 오스트리아 등 합스부르크 영토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스웨덴군이 레겐스부르크를 점령하고(1633년 11월), 남서부 독일의 스페인 세력을 지원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633년 10월에는 브란덴부르크를 위협하여 스웨덴과의 동맹에서 이탈시키려는 목적으로 슐레지엔과 브란덴부르크에서 전투를 벌였다.[9]

발렌슈타인은 작센, 브란덴부르크, 스웨덴, 프랑스와 평화 협상을 진행했지만, 그의 이중적인 태도에 작센과 브란덴부르크 측 협상 대표였던 아르님은 환멸을 느꼈다. 스웨덴의 악셀 옥센셰르나바이마르의 베른하르트는 발렌슈타인이 부하 장군들의 충성심을 잘못 판단하고 있다고 보았다. 보헤미아를 떠나 있던 이주민들만이 그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9]

발렌슈타인은 점성술 예언을 맹신하여 부하들을 과신했다. 오타비오 피콜로미니, 마티아스 갈라스, 알드링겐 백작 요한, 멜키오르 폰 하츠펠트, 심지어 발렌슈타인의 점성술가 기안 바티스타 제노까지도 황제에게 충성하며 빈 궁정에 음모를 알리고 다른 장교들의 지지를 얻었다. 발렌슈타인의 처남 아담 트로츠카, 야전사령관 크리스티안 폰 일로, 하인리히 홀크만이 그를 따랐으나, 홀크는 1633년 9월 전염병으로 사망했다.[9]

1634년 1월, 발렌슈타인은 50여 명의 장군과 연대장을 필젠으로 소집하여 반란을 준비했다. 1월 12일, 그들은 '황제를 받드는 한' 그를 지지하기로 맹세했지만, 서명할 선언문에는 이 조항이 빠져 있었다. 피콜로미니의 보고를 받은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을 해임하고 갈라스를 임명했으며, 트로츠카와 일로를 제외한 필젠 선언 서명자들을 사면하고, 발렌슈타인과 음모 주동자들을 체포하거나 숙청하라는 특허장에 서명했다(1월 24일).[9]

발렌슈타인의 사퇴 의사와 32명의 연대장과 함께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한 제2의 필젠 선언(1634년 2월 20일)은 무시되었다. 프라하가 황제를 지지하자, 발렌슈타인은 필젠을 떠나 에거(오늘날 체코의 헤프)로 향했다. 2월 25일, 아일랜드인 월터 버틀러 장군, 스코틀랜드 출신 연대장 월터 레슬리와 존 고든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그와 트로츠카, 일로 등을 살해했다. 영국인 대장 월터 데버루가 잠결에 애원하는 발렌슈타인을 미늘창으로 살해했다.[9]

사후 그의 유해는 체코 공화국의 이친에 안장되었다.[9]

4. 유산 및 후세의 평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은 암살 직후 그의 생애와 죽음을 다룬 여러 연극, 시, 신문 기사, 팸플릿에 등장하며 빠르게 유명해졌지만, 이러한 초기 각색 작품들 대부분은 현재 알려지지 않았거나 분실되었다.[40]

메밍겐에서는 4년마다 발렌슈타인 축제(Wallensteinfestspiele)가 열리는데, 이는 1630년 발렌슈타인이 이 도시에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뉘른베르크 근처 알트도르프에서는 1894년부터 3년마다 발렌슈타인 축제(Wallenstein-Festspiele)가 열리고, ''Wallenstein in Altdorfde''라는 연극과 실러의 발렌슈타인 3부작을 각색한 작품이 공연된다. 슈트랄준트에서는 매년 독일 북부에서 가장 큰 역사 축제인 발렌슈타인의 날(Wallensteintagende)이 열리며, 1628년 발렌슈타인의 포위전에서 도시가 해방된 것을 기념한다.

프라하의 발렌슈타인 궁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1863년 2월 28일 황제 칙령을 통해 발렌슈타인을 "영원한 존경에 합당한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영웅과 장군들" 목록에 포함시켰으며, 비엔나 군사 박물관의 펠트헤렌할레(Feldherrenhalle)에 그의 실물 크기 동상이 세워졌다.[47]

헤프(Cheb) 지역 박물관에는 발렌슈타인을 기리는 상설 전시관이 있는데, 초상화와 그림 외에도 그의 박제된 말, 그가 살해당한 방, 그리고 그의 살해 무기가 전시되어 있다. 뤼첸 성 박물관에서는 발렌슈타인을 30년 전쟁뤼첸 전투의 장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발렌슈타인 궁전은 발렌슈타인이 1623년부터 1630년까지 프라하 말라 스트라나 지역에 건설한 것으로, 총사령관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체코 국립 박물관은 2007년 11월 15일부터 2008년 2월 15일까지 이 궁전에서 발렌슈타인에 관한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했다.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는 1859년 교향시 《발렌슈타인의 진영》에서 발렌슈타인을 기렸는데, 이 작품은 원래 실러의 희곡을 위한 서곡으로 의도되었다.[48] 요제프 라인베르거는 1866년 교향적 음화 《발렌슈타인》(Wallenstein)을 작곡했으며, 4악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교향곡으로도 불린다. 1866년 11월 26일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뱅상 댕디는 1871년 교향적 3부작 《발렌슈타인》(Wallenstein)에서 발렌슈타인을 기렸다.

경제학자 아서 살츠(Arthur Salz)는 저서 『발렌슈타인, 중상주의자』(Wallenstein als Merkantilist)에서 발렌슈타인을 분석했다.[49] 1990년 체코 텔레비전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을 다룬 TV 영화 『재와 별』(Popel a hvězdy, The Ashes and The Stars)을 제작했으며, 지리 아다미라(Jiří Adamíra)가 발렌슈타인 역을 맡았다.[50][51]

발렌슈타인은 용병들의 수입을 보장하기 위해 군세(軍稅)라는 새로운 형태의 징세 제도를 활용했다. 이는 점령지에서 약탈 대신 세금을 걷어 용병들의 보수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상비군 형성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58] 그러나 급속한 출세와 군세 부담은 제후들의 반감을 샀고, 이는 발렌슈타인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재등장 이후 황제 측도 징세 방법을 습득하여 군대를 직접 통제하게 되면서, 발렌슈타인과 같은 자립적인 군인의 등장은 억제되었다.[58]

4. 1. 문학 속 발렌슈타인

독일의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는 희곡 《발렌슈타인》 3부작을 통해 발렌슈타인의 생애를 극화했다.[41] 이 작품은 발렌슈타인 생애의 마지막 시기인 필젠과 에거에서의 시간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대체로 역사적 사실과 일치한다.[41] 다만, 오타비오 피콜로미니의 아들 막스와 발렌슈타인의 딸 테클라의 사랑 이야기는 허구이다.[41] 실제 발렌슈타인의 딸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그가 사망할 당시 10세였고, 피콜로미니의 양아들 조셉 실비오 막스 피콜로미니는 그보다 한 살 더 많았을 뿐이었다.[41]

알프레트 되블린의 소설 《발렌슈타인》(Wallensteinde)은 발렌슈타인을 주요 인물로 다루지만, 소설의 초점은 발렌슈타인보다는 페르디난트 2세 황제에게 맞춰져 있다.[42] 되블린은 발렌슈타인을 경제적 천재성을 지닌 인물로 묘사하며, 그의 군사적 행동은 불가피한 경우에만 이루어진다고 보았다.[43] 또한 발렌슈타인을 종교 문제에 무관심하고 권력과 부를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 마르크스주의 역사 서술과 유사한 관점을 제시했다.[43]

헬무트 디발트(Hellmut Diwald)는 레오폴트 폰 란케(Leopold von Ranke)의 『발렌슈타인의 역사』(Geschichte Wallensteins)에 서문을 추가하면서 발렌슈타인 전기를 집필하기 시작했고, 그의 저작은 곧 새로운 표준 참고 자료로 여겨졌다.[44] 고로 만(Golo Mann)은 그의 전기 『발렌슈타인: 그의 삶』(Wallenstein. Sein Leben erzählt von Golo Mann)을 통해 발렌슈타인을 묘사하기도 했다.

발렌슈타인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Pedro Calderón de la Barca)의 희곡 ''엘 프로디히오 데 알레마니아(El Prodigio de Alemania)''의 주제이기도 하다.[46]

발렌슈타인 암살 직후 그의 생애와 죽음을 다룬 여러 연극, 시, 신문 기사, 팸플릿이 등장했으나, 대부분은 현재 알려지지 않았거나 분실되었다.[40]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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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서적 (Japanese)
[57] 서적 (Japane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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